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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도라의 상자는 열지 말았어야 했던 것일까.
막연하게 상상했던 일들이 현실이라는 것을 확인하니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뭐가 먼저였을까. 그 아이가 내가 마음이 멀어지기 시작했던 것? 새로운 사람이 그 아이의 인생에 끼어든 것?
뭐가 먼저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상황을 예상했었고, 2년 내내 대비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작이 그랬었기에, 끝도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처음 시작할 때에, 내가 너의 남자친구였던 사람의 가슴에 피멍을 새긴만큼 나도 언젠가 똑같이 당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사실 너무나도 발전된 빅데이터 덕분에 페이스북은 내 연인이 너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너의 관심 쇼핑목록을 끊임없이 내 페이스북 광고판에 띄워줬었다.
나랑 헤어지고 절대로 찾을 리가 없는 남성용 지갑이 너의 관심 쇼핑목록에 떴을 때, 마음 속 한 켠으로는 예상했었다.
하지만 합리화 했었다. 그럴 리 없고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고 괜찮다고. 왜냐면 내가 너에게 직접 말했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이 와도 나는 괜찮고 너의 행복을 빌어줄 거라고 말했었으니까.
허세였을까? 아니 그 순간엔 정말 진심이었던 것 같다. 근데 전혀 괜찮지 않았다. 가슴이 미칠듯이 답답했고 그 아이에게 전화에서 소리지르고 화 내고 싶었다. 왜 그래야만 했냐고. 내 빈 자리가 그렇게 짧은 기간에 만난 사람으로 채워질만큼 보잘 것 없는 것이었냐고. 그래서 전화를 했다. 받지 않았다. 계속 전화를 했다. 계속 받지 않았다. 문자를 했다. 전화를 받을 수 없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답이 왔다. 그러고 내가 평생 후회할만한 찌질한 짓을 할 뻔했지만 하지 않았다.
나를 멈추고 자제하고 최대한 감정을 억누른 채, 문자를 보냈다. 너에게 묻고 싶었다. 다른 사람이 생겨서 나랑 헤어지는 것에 동의했던 것이냐고. 하지만 문자는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지만, 의미가 없는 질문이었다고. 다시는 연락하지 않을거고 내 기억에서 너를 지우겠다고.” 보냈다.헤어질 때만 해도 서로 울면서 평생 서로를 기억하겠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정말 너를 기억에서 지워버리고만 싶었다. 없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친구 핸드폰으로 찌질하게 확인한 너의 배경화면 속의 맞잡은 두 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배경에서 보이는 차 안인 듯한 장소 때문이었을까.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남자를 만나고 있다. 나와의 데이트는 항상 손 잡고 걸으며 버스를 타야 했으니까.
그 남자를 만나며 나와 만났던 시간들을 비웃을 것 같아서 두려워서였을까. 내 옹졸한 자존심과 자격지심이 섞인 것이었을까.
난 참 자만했었다. 그 아이는 나 없이 절대로 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그 아이의 아빠였으며 엄마였고, 친구였으며, 오빠이자 애인이었다. 그 아이의 모든 부분을 채우고자 노력했으며 결국 그 부담감이 나를 짓눌렀다. 부담감은 어느새 책임감이 되었으며 그것은 사랑보다 커졌다. 오만이었다. 나 자신도 케어하지 못하는 내가 타인을 책임질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나 스스로를 좋은 남자친구라고 생각했다. 그 아이에게 더 필요했었던 건, 재정적인 지원이나 참견이 아니라 함께 있어주는 것이었을텐데. 저녁 10시에 일이 끝나고 왕복 2시간의 지하철 거리를 감수하며 그 아이의 얼굴을 보기 위해 갔었다. 그 노력을, 내 마음을 그 아이가 알아주고 느껴주고 고마워해주길 바랬다. 내 착각이었다. 나 스스로 자위하고 있었던 거다. 어쨋거나 그 당시의 나는 너무 지쳐있었고 바빴으며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누구 탓일까. 착각하고 오만했던 내 탓인 것일까. 자신은 나보다 체력이 약해 공강시간에 나를 보러오기 힘들다고 말하면서 고마움보다는 아쉬움의 측면에서 나를 바라본 그 아이일까. 둘 다 별로다. 후회가 된다.
나 자신을 갉아먹는 연애를 하고 있었다. 학업을 병행하며 미친 듯이 일을 하지만, 그 아이의 카드값, 섣부르게 데려온 고양이 병원비, 생활비로 인해 대출금과 신용카드빚만 늘어났다. 오히려 고맙다. 내 인생에서 스스로 빠져줘서. 너가 최고고 중심이었던 나에게 그게 아니라는 걸 알려줘서. 너를 그리워하며 평생을 자책했을 나에게 너에게 욕할 수 있는 기회를 줘서.
성공하고 싶다. 너가 나 때문에 미친듯이 울고 아쉬워했으면 좋겠다. 그 남자가 쓰레기여서 내 고마움을 느끼고 후회했으면 좋겠다.
너의 평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 나를 놓친 일이었으면 좋겠다. 내면보다는 외면에서, 스스로의 노력으로 얻은 것들보다는 우연하고도 불가항력적인 상황으로 얻은 것들을 소중히 여기는 너가. 그게 아니라고 끊임없이 말해주고 너에게 빛이 난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너 인생에 내가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어리석게 타인을 부러워하며 살다가 몇 년 후에 뼈저리게 후회했으면 좋겠다. 그 때, 나에게 새벽에 전화를 해라. 나는 너에게 사과할 기회도 변명할 틈도 주지 않을 것이다. 너는 그 말들을 너의 가슴 속에 묻어라. 그러다가 우연히 나를 길에서 만나라. 나는 너에게 성장한 내 모습을 보여주며 날 놔줘서 너무 고마웠다고 그래서 지금처럼 성공할 수 있었다고 말할 것이다. 내 마음 속 추악한 생각들을 가식없이 다 끄집어 내고 있다. 정말로 너와의 시간이 너무 후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