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쁘게 미쳤던’ 한 싸이코 소녀를 그리며…

 

벌써 꽤 많은 세월이 흘렀군요.
그때 전 의대 본과 3학년 학생으로 정신과 실습을 돌고 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어느 병원이나 정신과 입원실은 한 병동을 통째로 그 입구를 완전히 봉쇄하고
안쪽으로는 탁 트인 널찍한 공간을 마련해 놓는 소위 “폐쇄병동” 시스템으로 운영합니다.
이른 아침 실습 동료들과 함께 그 육중한 철문의 벨을 누를 때면
간단한 신분확인 후 어김없이 들리던 “꾸앙~” 하는 둔탁한 쇳소리는
아직도 가끔씩 기억에 되살아나 소름을 돋게 하곤 합니다.
실습학생들은 저마다 한명씩의 환자를 배정받아 실습기간 중
그들과 면담도 하고 병동 내에서 놀이도 같이 하면서 환자를 주의깊게 살핀 다음
수시로 담당 주치의와 환자 상태나 치료방침에 대해 의논을 하게 된답니다.
제가 맡았던 환자는 갓 고등학교에 들어갔던 16-7세 가량의 예쁘장한 소녀였습니다.
겉보기에 누구나 호감을 가질만한 귀여운 외모의 그 소녀는 뜻밖에도 우리말로
“색정광” 이라고 일컬어지는
흉칙하고도 망측한 병명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 아이의 대표적인 증상은 한마디로 이 세상 남자들이 전부 다 자기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었지요.
아니 그건 단순한 ‘생각’이 아니라 종교적인 ‘믿음’의 수준이었어요.
면담도중 어이없게도 그 아이는 저보다 먼저 정신과 실습을 돌았던
의대 동료들 이름을 주욱 대면서 제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선생님~ 그분들은 모두 제게 프로포즈를 했어요. 당장 결혼하재요.
나 지금 선생님도 똑같은 생각하고 있다는 거 다 알아요~”
소녀의 망상에 얼굴마저 빨개진 전 한동안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지요.
나중에 담당 주치의는 그 아이가 이제 거의 정신분열병 단계로 가고 있다는 귀뜸을 해주더군요.
어쨌든 그 이후로 그 아이와 조금씩 친해지면서 전 아주 특이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건 바로 그녀의 말투였습니다.
놀랍게도 그 아인 대부분 “시어”를 연상시키리만치
우아하고 고상한 단어들만을 가려쓰고 있는 것이었어요.
어쩌다 주변 환자들이 욕설이라도 하는 걸 들으면 금새 눈주위가 발게지고
눈물이 글썽거리면서 못견뎌 하더군요.
한번은 저와 탁구를 치다가 거듭되는 실수에 제가 그만 무심코
“아~ 미치겠네~” 란 말을 했더니 그 아인 그걸 욕으로 간주하고는
냅다 라켓을 집어던지고 어떻게 선생님이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며 펑펑 울더군요.
아마 “미친다”란 말이 예민하게도 어떤 감정적 증폭을 초래한 모양이었지만요…
그당시 실습이 끝나갈 무렵 간호학과 학생들과 함께 정신병동의
환자들을 위해 간단한 파티와 레크리에이션 시간을 가지는 게 일종의 전통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그 레크리에이션 시간, 환자들과 한가지 게임을 하다가
전 지금까지도 이렇게 기억에 생생하게 남게 된 충격적인 일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 시절 유행하던 소위 “스피드 퀴즈”란 게임을 할 때였지요.
마침 제 환자였던 그 소녀가 뒷쪽 종이에 적힌 어떤 단어를 설명하면
간호학과 학생 하나가 답을 맞추는 차례였답니다.
문제가 적힌 스케치북에는 매직으로 커다랗게 “어린이” 하고 적혀 있었어요.
여러분 같으면 그 단어를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놀랍게도 제 환자는 잠시도 머뭇거리는 기색없이 반사적으로 이렇게 말하더군요.
어른의 아버지
그걸 들은, 소위 자신이 정상인이라 믿는 간호학과 학생은 역시
지체없이 “할아버지~” 하고 외쳤다가 그만 ‘땡~’ 하고 오답을 알리는 종소리를 듣게 되었지요.
순간 그 자리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때 전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웃음의 많은 부분을 “역시 저앤 정신병자야… 싸이코야..”
하는 ‘비웃음’이 채우고 있었다는 사실을요…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제 충격의 이유는 이렇습니다.
그 아이의 ‘어린이’에 대한 엉뚱한 설명은 바로
저 유명한 미국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드의 싯구절이었기 때문이지요.
제가 시에 조예가 깊어서가 아니라 마침 그게 고등학교 때 영어 교과서에 실렸던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노라면 내마음 뛰노나니..’하고 시작되는 워즈워드의 명시
“무지개”의 한 구절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서였습니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그 자리에서 박장대소했던 사람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소녀의 시심을 이해했을런지 전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그 시간 이후로 전 한동안 심각한 회의에 빠지게 되었었지요.
저렇게 아름다운 생각들만이 머리에 가득 차있는 아이를 가리켜
누가 미쳤다 하고 누가 싸이코라 손가락질 하는가?
과연 자신있게 정상인이라 믿으며
때론 뭇사람들을 비방하고 헐뜯기에 욕설도 마다않는 나는 참으로 정상인인가?
아아… 그때의 복잡했던 제 머릿속에는 자꾸만 외눈박이 원숭이들이 사는 마을에
어쩌다 길을 잘못 들게 된 두눈 달린 정상 원숭이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그렇죠.
현대의학은 그녀를 정신병자라 낙인을 찍어버렸지만
그건 단지 외눈박이 원숭이들이 만든 룰에 따를 때 그랬다는 것일지 모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