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고 있다

 – 여기 자리 비었어요?

 그날 네가 물었던 그 목소리를 아직도 나는 기억하고 있다.
 낮고 울림이 있고 조금 허스키한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을 때 나를 내려다 보던 까맣고 먹먹한 눈동자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한참동안 말을 하지 않아 음이탈까지 난 내 목소리에 포스스 웃던 그 웃음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레 건너편 의자를 빼어 앉은 너는 커다란 백팩에서 이런저런 책을 꺼내 늘어뜨려 놓았다.

 소소한 첫 만남을 나는 생생하게도 기억하고 있다.

 몇 번이고 우리는 발 끝을 부딪히거나, 팔꿈치를 부딪혔다.
 덥고 끈적한 여름이었으면 그것이 불쾌 할 수도 있었을 것을, 가을의 끝자락인지라 옷깃이 스칠 때면 너도 나도 서로 모르게 흠칫 몸을 떨었다.
 멎쩍게 웃으며 고개 인사로 사과를 하고 다시 서로의 책에 코를 박았다.
 중간고사가 다 끝나갈 무렵에야 너는 보이지 않게 되었고, 나는 한 번 쯤 네 책에 써있는 이름이라도 볼 걸 그랬다고 아쉬워했다.

 계절 학기가 시작되고 강의실에서 다시 만난 너와 나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서로를 알아봤다.
 인사가 낯설어 눈만 마주치고 허겁지겁 고개를 돌렸더랬다.
 당황해서 쿵쾅대던 심장 소리가 한참동안 귓가에 선연한 것이 이상했다.
 몇 번의 수업이 지나가고, 추운 겨울이 끝날 무렵 너는 처음으로 내게 이름을 물었다.
 조심스레 옆자리에 앉아 시험은 잘 봤냐고 물었다.
 분명 처음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것임에도 불구하고 대화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것이 이상했다.
 너와 내가 가까운 사이가 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느날엔가 너는 잔뜩 어두운 목소리로 내게 전화를 걸었더랬다.
 잠깐 만날 수 있냐는 말에 왜 그렇게 들떴는지, 십분이면 되는 화장을 삼십분이나 걸려 공을 들이고 나서야 추운 겨울에 원피스를 입고 구두를 신었다.
 그렇게 하고 나갔건만, 너는 내 앞에서 서럽게도 전 애인을 찾았다.
 모질게 떠난 그 사람이 뭐가 그리 그리웠던 건지 너는 그리 서럽게도 그녀를 찾았다.
 그 날 나는 추운 것도 몰랐고, 감기에 걸린 것도 몰랐다.
 그저 눈물 대신 젖어드는 목소리를 새겨 들으며 내게 기대는 네 머리칼을 쓰다듬어줬다.
 넌 잘못한게 없다고 다독여줬다.

 네가 술김에 내게 키스를 했건만, 나는 그것 마저도 받아줬다.

 아마 나는 그때부터 이미 널 좋아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내가 그녀의 대용품이라는 생각이 언뜻 스쳐가긴 했지만, 그것마저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마치 당연히 그래야 했던 것 처럼 크리스마스 트리가 정리될 무렵 너와 나는 공공연히 손을 잡고, 팔장을 끼고, 입을 맞추는 사이가 됐더랬다.
 종종 함께 술을 마시는 날이면 넌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게 그녀의 얘기를 꺼내었지만,
 마무리는 늘 그렇듯 그녀의 탓인지라 나는 괜찮다며 너를 다독였다.
 그런 날이면 평소 다정하고 강하던 모습과는 달리 거칠었고, 나약했고, 무너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너 뿐만은 아니었다.

 우리의 시작도 그녀와 함께였고, 끝도 그녀와 함께였다.
 그녀는 어느날 갑자기 널 떠나버린 것 처럼, 어느날 갑자기 다시 널 찾아왔다.
 며칠이나 연락이 안 되던 너는, 그녀가 네게 그랬듯 갑작스레 내게 이별을 통보했다.

 통보였다.

 미안하다고 내게 빌었지만 그건 엄연히 통보였다.
 그녀가 아니면 안 되겠다며 내게 빌다시피 통보했다.
 그녀가 여태 널 좋아하고 있었는데, 너는 다른 사람을 만났다며 스스로를 자책했다.

 나는 군말 없이 돌아가라며 너를 돌려보냈다.
 잡아주리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치 내게서 벗어났다는 듯 나를 떠났다.

 그 뒤로 나는 꽃이 피고, 그 꽃이 다시 지고, 여름 비가 처연하게 내리는 계절까지의 기억이 흐리다.
 밥을 먹고, 수업을 듣고, 분명 누군가의 말에 웃기도 하고 맞장구도 쳐줬지만
 어느 날, 장맛비가 무섭게도 쏟아지던 여름 밤 불현듯 떠오른 네 생각에 베갯자락을 움켜쥐고 오열하던 그 순간까지의 기억이 흐렸다.
 네가 떠나고도 울지 않았던 나는
 왜 사는지 이유조차 모르고 하루하루를 견디던 나는
 그 날 쏟아지는 비만큼 처량하게 울고 나서야 내 삶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고 나니까 주변에서 네 소식을 들려주더라.
 나와 헤어지고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 그녀와 만나기 시작한 네 소식을.
 그녀와 만나고 한달을 채 넘기지 못하고 그녀가 같은 방법으로 널 무시하기 시작했다는 네 소식을.
 너희 둘이 만나고 두 달을 미처 채우지 못하고, 전과 똑같은 방법으로 헤어졌다는 네 소식을.
 이제와서 나를 다시 찾고 있다는, 네 소식을.

 햇빛이 뜨거운 여름, 나는 카페에 턱을 괴고 앉아 네 소식을 들으며 한 귀로 흘렸다.
 두툼한 코트를 입고 너와 마주앉아있었던 그 카페, 그 커피맛이 마치 꿈 처럼 희미했다.
 다시 연락 해보겠냐는 친구의 물음에 나는 단칼에 그 제안을 거절하고 먹던 커피마저 버려둔 채 카페를 빠져 나왔다.
 그렇게도 까맣고 깊었던 네 눈동자를 떠올리며 나는 조금 웃었다.
 속이 후련했다.

 못된 생각이었지만 통쾌했고, 잘 됐다며 발을 쿵쿵 구르며 집에 돌아와 양푼 가득 밥을 비벼 먹었다.
 그제야 정말 이별을 한 것 같았다.
 내 안에 남아있던 끈적끈적한 찌꺼기를 다 닦아낸 것 같았다.

 아직도 크리스마스가 지나갈 무렵이면 나는 종종 네가 생각난다.
 나를 그녀의 대용품으로 생각하고 고개를 숙여 입술을 포개던 네가.
 그 기억은 더 이상 아프지도, 고통스럽지도 않았고,
 해가 갈 수록 조금씩 변형 되어, 그때 우리의 입맞춤이 술집이었는지, 길거리였는지조차 희미하다.
 너의 기억은 그렇게 해가 갈수록 사용하는 연필심처럼 닳아가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자.
 날 찾지 말아라.
 부디 꼭, 너 같은 사람 만나길 바란다.